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장별 요약

제1부: 차라투스트라의 출발

차라투스트라는 독수리와 뱀 두 동물 친구와 함께 산 속 동굴에서 10년을 은둔하며 지혜를 연마합니다. 어느 날 아침 태양을 바라보며, 태양이 다른 이들을 비춰줄 때 행복하다는 사실에 영감을 얻은 그는 세상으로 내려가 자신의 지혜를 전하기로 결심합니다 . 산을 내려오다 숲에서 만난 **성자(은자)**는 신을 찬양하며 살아가는데, 차라투스트라는 그 성자가 아직 “신은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 이어 **시장에서 줄타기 광대(곡예사)**의 공연을 구경하러 모인 군중 앞에서 연설을 시작합니다. 그는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하나의 밧줄이며, 인간의 목표는 자기 자신보다 위대한 존재, 즉 **초인(Übermensch)**을 창조하는 것이라 선포합니다 . 또한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며 자기 극복의 중요성을 설파합니다 . 그러나 군중은 그의 가르침을 비웃고 조롱하며, 마침내 줄타기 공연이 시작됩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말대로 줄타는 사람은 심연 위에 팽팽히 걸린 밧줄을 건너가는데 , 공연 도중 광대가 나타나 뒤에서 그를 재촉합니다. 광대는 줄타는 사람을 뛰어넘으며 밧줄을 흔들고, 결국 곡예사는 균형을 잃고 추락하여 죽고 맙니다 . 군중이 흩어지고 난 뒤 차라투스트라는 죽어가는 줄타는 사람을 위로한 후 그의 시신을 어깨에 메고 숲으로 가 빈 나무에 안치합니다 . 이 사건을 겪은 차라투스트라는 더 이상 무리 지어 모인 대중에게 설교하지 않고, 소수의 선택된 제자에게만 가르치겠다고 다짐합니다 . 이후 제1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여러 담론을 통해 기독교적 도덕 체계를 통렬히 비판하고 기존 가치들을 전복하는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 그는 사람들에게 기존의 선악의 기준을 버리고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창조하라고 역설하며, 몇몇 제자들을 모으는 데 성공합니다.

제2부: 위버멘쉬(초인)를 찾아서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을 남겨둔 채 다시 산의 동굴로 돌아가 한동안 고독 속에 칩거합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밤, 그는 어린 아이가 든 거울을 보는 꿈을 꾸는데,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아닌 악마의 찡그린 얼굴과 조롱하는 웃음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 환영을 자신의 교리가 적들에 의해 왜곡되고 있음을 알리는 징조로 해석합니다. 이에 그는 잃어버린 옛 제자들을 찾고 가르침을 바로잡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다시 산을 내려와 세상 속으로 나아갑니다 . 제2부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여러 새로운 담론을 이어가며, **“신은 죽었다”**는 선언 이후 도래한 허무주의 속에서 초인의 이상을 거듭 강조합니다. 또한 니체 사상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인 **“힘에의 의지”**가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처음 언급되며 암시됩니다 .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자신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 하나를 밝히지 않고 마음 속에 감춥니다. 마침내 그는 제자들에게서 다시 떠나며, “너희가 스스로 나를 버릴 때에야 비로소 내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라는 취지로 말하고 떠나갑니다(제자들이 스승인 자기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립하기를 바라서였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두 번째로 제자들을 뒤로 한 채 홀로 산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을 연마하며 자아완성의 시간을 갖습니다  .

제3부: 차라투스트라의 고난

긴 시간이 흐른 후,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동굴로 돌아오는 여정에 오릅니다. 그 길에서 그는 등 위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난쟁이를 만나는데, 이 난쟁이는 두 다리가 퇴화된 두더지 모습까지 겸비한 이상한 존재입니다. 이는 땅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의 영”(혹은 악령)으로, 차라투스트라의 발걸음을 심연 아래로 잡아끌며 끊임없이 비관적인 속삭임으로 그를 조롱합니다 . 처음엔 낙담한 차라투스트라였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내어 중력의 영에 맞섭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이 숨겨왔던 가장 심오한 사상을 그 존재 앞에서 밝히는데, 그것이 바로 “깊은 심연의 사상” 즉 영원회귀의 교리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시간이 무한히 앞뒤로 뻗어 있어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이미 이전에도 일어났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 이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의 사상을 막 입에 올린 순간, 차라투스트라는 어디선가 공포에 질린 개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습니다. 곧이어 그는 하나의 환영을 보는데, 한 양치기가 검은 뱀을 목구멍 깊숙이 물고 질식해가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필사적으로 외쳐 **“뱀의 머리를 물어 끊으라!”**고 독려하고, 마침내 양치기는 용기를 내어 뱀의 머리를 단숨에 물어뜯어 뱉어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양치기는 더 이상 양치기도 인간도 아닌, 완전히 변모한 존재가 되어 환하게 빛을 내며 웃음을 터뜨립니다 . (이 초월적인 웃음 짓는 존재는 영원회귀를 극복한 새 인간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환영들을 지나 산속 동굴로 귀환합니다. 동굴에서 그는 인류의 하찮음에 대해 깊이 절망합니다. 인간들이 추구하는 삶이 천하게 느껴지고, 그런 하찮은 인간 종족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영원회귀의 사상 앞에서 큰 좌절을 겪습니다 . 그러나 절망에 잠식되지 않은 차라투스트라는 곧 자신의 영원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며, 영원회귀조차 긍정하려는 의지를 되찾습니다 . 다시 말해 그는 무한히 반복되는 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예(Yes)”라고 긍정합니다. 제3부 끝자락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영원회귀의 사상을 처음으로 기꺼이 포용합니다. 이는 그의 가르침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으로, 차라투스트라 자신이 가르치던 사상을 몸소 체험하며 한 단계 도약했음을 의미합니다.

제4부: 축제의 밤과 새로 떠오르는 태양

세월이 흘러 차라투스트라는 동굴에서 홀로 노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앞에 한 **예언자(점쟁이)**가 찾아와 자신이 차라투스트라를 시험하기 위해 왔다고 말합니다. 예언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동정(연민)은 인간이 빠질 수 있는 마지막 죄”**라 경고하며, 바로 그 동정심으로 그를 유혹하러 왔다고 알립니다 . 바로 그때 동굴 밖에서 누군가 고통에 찬 외침을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예언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보다 높은 인간(우월한 인간)이 당신을 부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 놀란 차라투스트라는 그 **‘높은 인간’**을 찾아 돕기 위해 서둘러 산을 내려갑니다. 그는 수색 도중 차례로 두 명의 왕, 마술사, 신을 잃은 마지막 교황,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사람, 그리고 오랫동안 자신을 따라다닌 자신의 그림자 등 기묘한 인물들을 차례로 만나 대화를 나눕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 여러 인물들을 모두 자신의 동굴에서 기다리라 초대한 뒤, 하루 종일 찾아 헤맸지만 정작 애초에 외쳤던 **‘그Higher 인간’**은 끝내 발견하지 못합니다 . 낙담하며 집으로 돌아온 차라투스트라는 놀랍게도 자신의 동굴 안에서 다시 한 번 도움을 청하는 고통 어린 외침을 듣게 됩니다. 그는 그날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신의 동굴에서 외치고 있음을 깨닫고 놀랍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을 **“높은 인간들”**이라 부르며 환영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기다려온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들은 그가 평생 기다려 온 **초인(Übermensch)**이 아니라 초인의 도래를 예고하는 선구자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동굴로 찾아온 이 손님들을 위해 **만찬(향연)**을 베풉니다. 식사 자리에서는 온갖 철학적 대화와 노래가 오가고, 심지어 익살스럽게도 **당나귀를 숭배하는 의식(나귀교)**까지 벌어집니다 . 이는 높은 인간들조차 새 가치에 목마른 나머지 아무 대상에나 경배를 바치는 아이러니한 장면으로, 기존 종교 의식을 풍자합니다. 밤이 깊어 축제가 끝날 무렵, 높은 인간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삶을 긍정하도록 가르쳐준 차라투스트라에게 깊이 감사하며 경의를 표합니다 .

다음 날 아침, 차라투스트라가 동굴 밖으로 나오자 머리 위로 한 마리 사자와 비둘기 떼가 나타납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이 “자식”이라고 부르는 진정한 제자들, 곧 미래에 올 초인들이 가까이 왔다는 신호로 해석합니다 . 곧 동굴 안에 있던 높은 인간들도 바깥으로 나오는데, 기다리고 있던 사자가 그들을 향해 포효합니다. 높은 인간들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사자에게서 도망치듯 흩어집니다 . 그들이 지른 비명은 차라투스트라로 하여금 전날 예언자가 경고했던 **동정(연민)**의 유혹을 상기시키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보고 미소 지으며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부터는 오직 나 자신의 일(사명)에만 집중하겠다”**고 선언합니다 . 이렇게 차라투스트라는 더 이상 미완의 인간들에 대한 연민을 떨쳐내고, 진정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에만 매진할 것을 다짐하며 이야기가 끝맺습니다.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초인의 도래만을 향해 흔들림 없이 전진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2. 핵심 사상 정리

• 초인 (Übermensch): 니체가 ‘초인’이라고 번역한 Übermensch는 문자 그대로는 “인간을 넘어선 사람”을 뜻하며, 현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이상적 인간상을 가리킵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에게 스스로를 끊임없이 넘어서는 삶의 자세를 요구하며, 기존의 낡은 가치와 도덕을 모두 버리고 자기 자신이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가 될 것을 촉구합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이후 아무 의미도 남지 않은 세계에서, 허무주의를 딛고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존재가 바로 초인입니다  . 초인은 더 이상 전통적 신이나 절대적 도덕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가치 창출의 역할을 합니다. 완전한 자유와 자기창조가 초인의 특징으로, 초인은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자신을 규정하지 못하도록 삶을 개척합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인간 정신이 거쳐야 할 변화를 낙타→사자→어린아이의 비유로 설명하는데, 최종 단계인 어린아이의 정신이 곧 초인의 경지라고 말합니다 . 그러나 니체 자신도, 작품 속 차라투스트라 역시 그 완성된 초인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 초인은 쉽게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류가 미래에 지향해야 할 목표이자 이상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 영원회귀 (Ewige Wiederkunft): 영원회귀란 세계의 모든 사건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사상으로,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원처럼 순환하여 현재 일어나는 일이 과거에도 무한히 일어났고 앞으로도 똑같이 되풀이된다는 개념입니다  . 니체는 이 사상을 통해 궁극적인 허무주의를 묘사했습니다. 만일 모든 것이 무한 반복된다면 인생에는 어떠한 궁극적 목적이나 진보도 없고, 결국 **“아무 의미 없는 똑같은 삶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생각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 이러한 영원회귀의 생각은 자칫 인간을 삶의 부정과 허무에 빠뜨리는 가장 극단적인 사상이지만, 니체는 도리어 그것을 삶에 대한 최종 시험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태도로, 설령 똑같은 고통과 실망이 영원히 반복될지라도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라고 요구합니다 . 다시 말해 영원회귀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자기 삶 전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참된 삶에 대한 사랑이라고 보았습니다. 니체는 인간이 영원회귀의 무거운 사상을 견디고도 삶을 “예!”라고 긍정하려면, 자기 자신의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를 최고조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 힘에의 의지란 삶을 향한 근본적인 추진력으로서, 모든 좌절과 무상함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꾸는 창조적 힘을 뜻합니다.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견디는 데 그치지 않고 기쁘게 긍정하며 춤추듯 살아갈 수 있는 인간, 즉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고 매 순간에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초인입니다 . 결국 영원회귀 사상을 허무주의에서 삶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시키는 자가 초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품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 사상을 처음 들었을 때 절망에 빠졌지만, 나중에 춤과 웃음으로 영원회귀를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르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운명애)하게 됩니다 . 이처럼 영원회귀의 깨달음은 차라투스트라 사상의 정점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지금 이 순간의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 신은 죽었다 (Gott ist tot): 니체의 가장 유명한 선언 중 하나인 **“신은 죽었다”**는 초인 사상과 연결된 중요한 명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 기독교의 신 뿐만 아니라 절대적 진리와 최고 가치를 상징합니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근대에 이르러 절대적인 도덕과 신앙의 권위가 무너졌고, 더 이상 신이 인간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 작품의 머리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숲 속의 성자를 만나고 나서 혼잣말로 **“저 늙은 성자가 아직 숲에서 이 소식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 신은 죽었는데!”**라고 말하며 이 선언을 처음 언급합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신의 죽음을 하나의 “기쁜 소식(복음)”**으로 선포하는데, 신이 사라짐으로써 저 하늘의 천국에 대한 헛된 희망도 사라지고 마침내 우리 스스로 자신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 다시 말해, 신의 죽음은 인간이 더 이상 외부의 절대적 가치에 의존할 수 없는 상태, 곧 가치의 공백과 허무주의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 니체는 이러한 최고 가치의 붕괴로 인한 혼란(허무주의)을 날카롭게 경고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새로운 시작의 계기로 보았습니다. 기존의 신과 도덕이 사라진 자리에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만 합니다. 니체는 이렇게 과거와 전혀 다른 새 인간형을 **초인(Übermensch)**이라고 불렀습니다 . 초인은 신이나 이상향(천국)에 기대지 않고 이 땅에서 자신의 의지로 삶의 의미를 개척하는 존재로,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을 극복하기 위한 해답입니다 . 즉, 신의 죽음으로 촉발된 허무를 정면 돌파하여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가 초인인 것입니다. 요약하면 니체에게 “신은 죽었다”는 말은 서양 전통 도덕의 붕괴와 가치관의 전환을 상징하며, 그 공백을 메울 긍정적 대응으로 초인의 등장을 요구하는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니체는 신이라는 관념 자체가 인간이 현실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라고 분석하며, 진정 신을 “죽인다”는 것은 인간이 더 이상 자기 삶을 연민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웃음과 용기로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

• 인간 정신의 세 가지 변화 (낙타-사자-어린아이):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 초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할 내면의 발전 단계를 세 가지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는 인간의 정신이 **“짐을 나르는 낙타”**에서 **“자유를 쟁취하는 사자”**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새로운 어린아이”**로 변모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 이 **세 가지 변신(메타모르포시스)**은 각각 인간 정신의 상태와 과제를 상징합니다:

• 낙타: 낙타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사막을 건너는 인내심 강한 짐승”**으로 비유됩니다. 이는 인간 정신이 처음에는 전통과 도덕이라는 무거운 외부의 가치와 규범을 스스로 등에 지고 복종하는 단계를 뜻합니다 . 낙타의 정신에서 인간은 시키는 대로 따르고 “Yes”만 반복하며 헌신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짓누르는 자기희생적인 삶입니다 . 즉 노예적 복종과 금욕적 자기학대로 특징지어지는 단계가 낙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도덕과 권위를 맹목적으로 떠안는 이 낙타의 상태에 머무르곤 합니다.

• 사자: 낙타가 충분히 자신을 짓누른 뒤에는, 그 무게를 털고 일어서려는 정신이 태동합니다. 사자는 자유를 갈망하며 포효하는 맹수로, 낙타의 정신이 변하여 맞이하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 사자의 정신이 된 인간은 더 이상 어떤 외부의 주인이나 권위에도 복종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자유를 쟁취하려 듭니다. 사자는 자신을 억압해온 **옛 주인들(외부 권위)**과 맞서 싸우며, 거대한 **용(dragon)**과도 같은 기존의 도덕률에 저항합니다 . 그 용은 인간에게 **“너는 해야만 한다(Thou Shalt)”**라고 명령해온 절대적 가치(전통 도덕)를 상징하는데, 사자는 이에 **“나는 ~하고 싶다(I Will)”**라고 응수함으로써 모든 외부 명령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욕망과 의지에 충실하겠다고 선언합니다 . 이로써 사자는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를 갖추게 되며, 낙타의 순종을 떨쳐내고 자유와 자존을 얻습니다. 그러나 사자의 단계에서도 한계가 있습니다. 사자는 비록 **과거의 주인(용)**에게 반항하여 이겼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합니다 . 그는 **싫어하는 것을 부정할 줄은 알지만, 삶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법은 아직 모르는 상태입니다 . 그래서 사자의 마음엔 완전한 즐거움과 해방감이 부족하며, 여전히 어딘가 무거움과 진지함이 남아 있습니다. 요컨대 사자의 정신은 옛 가치를 부정하여 자유를 얻은 상태이지만 아직 새로운 “예”를 말하지는 못한 과gangd디입니다.

• 어린아이: 마지막으로 인간 정신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로 거듭나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정신은 곧 새로운 시작과 창조의 정신입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말하길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바퀴, 최초의 움직임이자 신성한 긍정”**이라고 했습니다 . 즉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인간은 과거의 무거움을 완전히 잊고 죄책감이나 거리낌 없이 자기 욕망에 충실하며, 세상을 놀이와 창조의 장으로 바라봅니다. 어린아이는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 순수한 호기심과 기쁨으로 창조하기 때문에, 비로소 “예”라고 삶을 긍정하는 존재가 됩니다 . 사자에게 거대한 두려움과 부정의 대상이었던 그 **용(옛 권위)**도 이제 어린아이에게는 그저 웃음거리나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 어린아이는 더 이상 과거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완전한 자유 속에서 춤추고 웃으며 새로운 가치를 탄생시킵니다. 이 천진난만한 창조의 정신이야말로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삶에 대한 궁극적 긍정의 자세이며, 초인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

이 세 단계의 비유를 통해 니체는 인간 정신의 발전 과정을 보여줍니다. 먼저 복종과 짐의 단계(낙타)를 거쳐, 반항과 해방의 단계(사자)에 이르고, 최종적으로 **순수한 창조의 단계(어린아이)**에 도달해야 참된 자기극복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신을 통해서만 인간은 옛 도덕의 무게를 벗어나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유로운 정신, 곧 초인이 될 수 있습니다  .

3. 등장인물 및 상징 해석

차라투스트라의 성격과 역할

차라투스트라는 이 책의 주인공이자 니체의 철학적 대변자인 예언자입니다. 그는 고독한 산 속에서 10년을 보내고 내려온 **현자(賢者)**로서, 인류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예언자적 면모를 보입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말투와 행적은 의도적으로 성서의 복음서를 연상시키도록 묘사되어 있습니다 . 실제로 그의 여러 가르침과 비유들은 성경의 문장을 패러디하거나 변용한 것이 많아서, 책 전체가 신약성서의 패asticature 같은 분위기를 띕니다. 니체는 기존의 성자들이 전해온 선악의 교훈을 뒤집기 위해,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을 의도적으로 주인공에 부여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였던 역사적 **차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는 전통적으로 선과 악의 이분법적 도덕을 처음 제시한 인물인데, 니체는 **“가장 도덕적인 사람의 이름을 빌려 가장 비도덕적인(도덕을 넘어서는) 사상을 설파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 이는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에게 기존 도덕의 창시자가 스스로 그것을 철저히 극복하게 하는 역할을 부여했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작품 속 차라투스트라는 끊임없이 기존의 도덕과 가치관을 해체하면서 인간에게 새로운 가치 창조를 요구합니다. 그는 **“진실한 자만이 새로운 가치를 세울 수 있다”**고 믿으며, 기만적인 이상에 안주하는 태도를 누구보다 혐오합니다  .

차라투스트라의 성격은 한편으로 사랑과 지혜로 충만한 성인(聖人)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자존심 강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 그는 스스로를 태양에 비유하며 자신의 지혜가 넘쳐흐른다고 말할 정도로 자부심이 강하고, 이러한 자아도취적 모습은 니체가 그의 캐릭터를 통해 의도적으로 표현한 측면입니다 . 그러나 이러한 자신감은 자신을 위대하게 포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기존 도덕적 겸손의 가식을 깨부수기 위한 문학적 장치라 볼 수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앞에서 담대히 초인을 선포하고 신의 죽음을 알리지만, 그의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대중들은 그의 가르침을 조롱했고(프로로그의 광장 장면), 제자들 조차도 끝내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차라투스트라는 몇 차례나 실망과 고독을 겪으며 다시 동굴로 물러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때마다 스스로를 극복하며 더 큰 통찰에 도달하고, 다시 내려와 새로운 인간들을 찾는 끈기를 보여줍니다  . 제3부에서는 자신이 전하려던 가장 어려운 가르침(영원회귀)을 차마 말하지 못해 번민하다가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노래하며,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입니다  . 제4부에 이르면 차라투스트라는 여러 **‘우월한 인간들’(Higher Men)**을 시험하며 그들의 한계를 확인하고, **연민(동정심)**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다잡습니다  . 최종 장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사자의 포효로 상징되는 사건을 통해 자기 연민을 떨쳐버리고 완전한 초인 지향의 길로 나아갈 결심을 굳힙니다 . 이러한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차라투스트라의 역할은, 단순한 교사라기보다 자신 역시 성장하고 변모하는 “살아있는 가르침” 그 자체입니다. 그는 말과 행동으로 제자들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체험으로 니체 철학의 핵심을 몸소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입니다. 결국 차라투스트라는 **“모두를 위한 책이자 아무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부제처럼, 이해할 준비가 된 소수에게만 자신의 지혜를 전하고자 했던 위대한 예언자로 그려집니다 .

상징적인 인물 및 장면

• 독수리와 뱀: 차라투스트라가 산속에서 데리고 지낸 두 동물인 독수리와 뱀은 각각 **“자존심(긍지)”과 **“지혜(영리함)”**를 상징합니다 . 일반적으로 독수리는 가장 높이 나는 고귀한 새이고 뱀은 가장 지혜롭지만 교활한 동물로 여겨집니다. 니체는 이 대조적인 두 동물을 차라투스트라의 동반자로 설정함으로써, 그의 정신이 높은 이상에 대한 자부심과 날카로운 지혜를 모두 갖추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차라투스트라는 독수리와 뱀을 **자신의 “교만(자존)”과 “지혜”**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나는 숭고한 자부심을, 뱀이 스스로를 독수리에게 감으면서도 해를 끼치지 않는 모습은 지혜와 본능의 조화를 나타냅니다. 이처럼 독수리와 뱀은 차라투스트라의 내면적 속성을 의인화한 상징으로서, 초인을 향한 인간의 이상과 통찰을 동시에 상기시켜줍니다.

• 줄타는 사람 (곡예사): 프로로그(머리말)에서 등장하는 줄타기 곡예사는 인간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알레고리적 인물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을 **“짐승과 초인 사이를 가로지르는 위험한 줄”**에 비유했는데, 줄타는 사람이 바로 그 줄 위를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인류의 모습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 심연 위에 걸린 줄은 인간 존재의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태, 즉 동물적 본능과 초인적 이상 사이의 과도기로서의 삶을 상징합니다 . 줄타는 사람은 그 위를 건너며 위대함을 향해 나아가는 개인을 나타내는데, 초인을 향해 스스로를 넘어서고자 분투하는 **“자기극복의 용기”**를 상징합니다 .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는데, 이는 평범함을 넘어 위대함으로 도약하려는 과정의 어려움과 위험을 보여줍니다. 결국 줄타기 광대는 광대의 방해로 추락하여 목숨을 잃는데, 이는 위대한 목표를 향한 도전에는 실패와 희생이 따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죽어가는 곡예사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그의 도전을 존중해주는데, 이를 통해 비록 초인에 이르지 못하고 쓰러졌더라도, 더 높은 인간이 되고자 분투한 삶에는 고귀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 요컨대 줄타는 사람은 초인을 지향하는 인간 개개인의 상징이며, 그의 위험천만한 공연은 인간 존재의 과도기적 고뇌와 용기를 대변합니다.

• 광대 (어릿광대, 곡예 방해자): 줄타는 사람이 건너는 밧줄 위에 난입한 광대는 그를 비웃고 방해하여 결국 추락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이 광대(또는 어릿광대, 광대라고도 번역됨)는 작품 내에서 탓할 수 없는 악의와 조롱의 힘을 상징합니다. 그는 평범한 대중의 조롱과 두려움을 대표하며, 위대함을 추구하는 이를 비웃고 끌어내리는 사회의 힘으로 볼 수 있습니다 . 광대가 공연 도중 나타나 줄을 흔들고 “길을 비켜라”고 외치며 방해한 것은, 인간이 초인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맞닥뜨리는 조롱과 장애를 의미합니다. 이는 **안주하는 다수의 인간(중간 인간)**들이 변화를 두려워하여 앞서 나가려는 이를 방해하고 희생시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광대의 행동으로 곡예사가 추락한 장면은, 위대한 이상을 좇는 사람이 겪는 비극과 사회의 냉소를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요컨대 이 광대는 “최후의 인간”(Nietzsche가 경고한 안주하고 창조하지 않는 인간상)의 화신이자, 혁신을 가로막는 조롱과 비난의 세력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광대에게 분노하지 않고 떠나보냅니다. 이는 진정한 가르침은 조롱하는 다수를 상대하기보다, 이해할 준비가 된 소수에게 집중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광대는 줄타는 사람과 더불어 인간 조건에 대한 니체의 통찰을 전달하는 상징적 인물로서, 인류가 초인을 향해 나아갈 때 반드시 넘어야 할 장애를 상기시킵니다.

• 동굴: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은 작품 전반에 걸쳐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며, 여러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먼저 동굴은 차라투스트라가 은둔과 명상을 통해 지혜를 쌓는 공간입니다. 10년간 그가 머물렀던 이 산속 동굴은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장소로,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정신적 치유와 성장이 이루어지는 자기 수양의 공간입니다 . 어떤 면에서 이 동굴은 플라톤의 동굴과 대비됩니다. 플라톤의 동굴이 무지와 환상의 공간이었다면,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은 오히려 지혜와 깨달음의 자궁과도 같습니다 . 실제로 한 해설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동굴은 고독과 지혜, 치유의 공간이며, 그를 인간 이상의 존재로 키워준 자궁 같은 곳”이라고 평했습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세상에서 상처 입고 실망할 때마다 이 동굴로 돌아와 마음을 추스르고, 더 큰 진리를 깨달은 후 다시 세상으로 나갑니다. 따라서 동굴은 **일종의 모태(母胎)**처럼 작용하여 새로운 시작과 재탄생의 장소가 됩니다 . 또한 동굴은 차라투스트라와 ‘높은 인간들’이 만나는 장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띱니다. 제4부에서 여러 방랑자들이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에 모여드는 것은, 동굴이 새 시대를 갈망하는 영혼들이 모이는 중심지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은 밤에는 그들과 축제가 벌어지는 공동체의 장이 되지만, 아침이 오자 사자의 포효로 높은 인간들이 쫓겨나 버리는 진리의 시험대가 됩니다. 이처럼 동굴은 외부 세계와 대비되는 내면 세계를 상징하며, 시련과 성찰, 그리고 새로운 탄생이 반복되는 무대로 기능합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은 그의 사상적 자립과 성숙을 가능케 한 성소(聖所)이자,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자궁과 같은 상징성을 지닙니다.

• 난쟁이 (중력의 정령): 제3부에 등장하는 난쟁이는 차라투스트라의 등에 올라타 그를 짓누르는 존재로, **“중력의 영(정령)”**이라고 불립니다 . 이 난쟁이-두더지 모습의 괴물은 위로 상승하려는 노력에 가해지는 정신적 부담과 회의를 상징합니다. 난쟁이는 성장하지 못하고 왜소해진 모습을 통해 **“더 높은 것으로의 상승을 거부하는 자”**를 의미하고, 햇빛을 기피하는 두더지의 속성은 염세주의와 비관론을 나타냅니다 . 즉 이 중력의 영은 인간 정신을 아래로 잡아끄는 힘, 예를 들어 무거운 죄책감, 두려움, 체념, 또는 구시대의 도덕과 신앙 등을 상징합니다 . 차라투스트라가 이 난쟁이를 등에 진 채 걸을 때 그 존재는 끊임없이 그에게 냉소적인 조언을 속삭입니다. 이는 인간이 자기극복을 시도할 때 내부에서 들려오는 의심과 부정의 목소리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난쟁이는 “이 길은 심연으로 떨어지는 길 아니냐”고 차라투스트라를 조롱하며 낙담시키지만 ,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견뎌내고 오히려 난쟁이에게 자신의 심연의 사상(영원회귀)을 들려주며 맞섭니다 . 이 대결은 자기 내면의 부정적 무게를 이겨내는 과정을 보여주며, 마침내 차라투스트라가 중력의 영을 극복하는 것은 영원회귀의 깨달음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 난쟁이는 결국 사라지지만,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과거의 정신적 부담(신앙과 도덕의 무게)**을 떨쳐냈음을 뜻합니다 . **“중력”**은 본래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이기에, 초인을 향해 위로 오르려는 인간에게 최악의 장애가 됩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 중력(무거움)의 상징을 이겨냄으로써 가벼움과 웃음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따라서 난쟁이(중력의 영)는 초인을 향한 길에서 직면하는 내적/외적 중력, 혹은 인간을 땅에 묶어두는 힘을 의미하며, 이를 뛰어넘는 것이 이 책의 핵심 과제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사자와 비둘기, 그리고 나귀: 제4부의 결말 부분에서 등장하는 사자와 비둘기 떼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주어진 표징(징조)**으로 묘사됩니다 . 사자는 전술한 바와 같이 용맹과 자유의 상징이고, 비둘기는 성서에서 평화와 성령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둘이 함께 나타난 것을 보고 자신이 기다리던 “아이들”, 즉 초인의 예고자들이 가까이 왔다고 기뻐합니다 . 이는 그의 사상이 곧 결실을 맺을 것이라는 희망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사자는 동굴에서 나온 높은 인간들에게 포효하여 그들을 쫓아버리는데, 이 장면은 차라투스트라가 높은 인간들에 대한 동정심을 버리고 더욱 큰 이상을 향해 나아갈 결의를 다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 마지막으로 **나귀(당나귀)**는 높은 인간들이 벌인 우스꽝스러운 숭배 의식의 대상입니다 . 높은 인간들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남는 공허함을 메우려 나귀를 신봉하는 광경을 연출합니다. 이는 인간이 잘못된 대상이라도 맹목적으로 숭배하려 드는 성향을 풍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귀는 성경에서 고집스럽고 둔한 짐승의 대명사인데, 여기서는 종교적 권위에 길들여진 인간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의 나귀 숭배를 한탄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지만, 사자의 등장으로 그 마저도 끝이 납니다. 이 에피소드는 차라투스트라가 추구하는 초인의 경지에는 기존의 경배나 의식이 필요 없으며, 웃음과 용기로 옛 종교적 습속을 넘어서야 함을 암시합니다. 즉 나귀 숭배 장면은 낡은 신에 대한 패러디이자 새 시대의 가치 부재 상황에 대한 풍자이며, 차라투스트라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 창조의 단계와 대비를 이룹니다.

以上과 같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서사적인 비유들과 상징을 통해 니체의 철학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각 장별 줄거리와 사건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니체가 전달하려는 사상 – 인간은 스스로를 넘어 초인에 이르러야 하고, 신과 절대적 도덕이 사라진 시대에 자기 삶을 영원히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를 드라마틱하게 펼쳐 보이는 장치들입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낡은 가치의 죽음과 새로운 가치의 탄생을 역설하며, 독자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극복과 **삶에 대한 강렬한 “예”**를 요구합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그 문학적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핵심 사상 – 초인, 영원회귀, 신의 죽음, 자기극복의 변신 – 을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전체 맥락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인류에 던지는 니체의 거대한 질문을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참고 문헌: 니체 원문 (『Also sprach Zarathustra』) 및 철학 해설서/논문    등을 종합하여 분석. 또한 이진우 교수 번역본과 철학자 이정우 등의 해설을 참조하였습니다. (출처는 본문 각주에 표기)